죽게되면 말없이 죽을것이지 무슨구구한이유가따를것인가.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(유서) 라도 첨부되어야 하겠지만
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.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다.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.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증오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.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, 사는 일은 곧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,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.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″생의 백서″가 되어야 한다. 그리고 이 육신으로는 일회적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같은 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. 누구를 부를까? (유서에는 누구를 부르던데) 아무도 없다. 철저히게 혼자였으니까.
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. 하지만 생명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. 그것은 보라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
고리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도 말한 바 있다.
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.
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회의 눈이 멀어 버리고 작을 때에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.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는지도 모르겠다.
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.
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.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, 그는 팔 하나와 말을 더듬는 장애자였다.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. 돈은 서너 가락치 밖에 내지 않았었다.
이 일이,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.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.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.
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,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.
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그 차거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하겠지만, 무덤도 없을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.
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.
″어린 왕자″가 사는 별나라.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.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.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다.
- 글 / 법정(法頂) 스님 - ♣ 법정(法頂) 스님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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